충주시 성내동의 한 건축공사 현장에서 '충주읍성' 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돌 9개가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김희찬(아이들의 하늘 간사) 씨에 따르면 조선시대 '충주목'관청이 있던 현재의 관아공원 인근 성내동 217번지 건축공사 현장에서 18일 충주읍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돌 9개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충주읍성은 1869년(고종 6년) 2월 충주목사 조병로의 주도로 개축돼 그해 11월 완성되었다. 이때 개축된 성의 둘레가 3천950척(1척≒30.3㎝일 경우 약 1.2㎞), 두께 25척(약 7.5m), 높이 20척(약 6m), 치첩(雉堞;여장) 415칸으로, 1872년에 제작된 '충주목지도'에 읍성의 모양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1896년 1월 을미의병의 충주성 점령과 그에 따른 전투, 퇴각하면서 방화로 인해 원형을 잃기 시작했고, 1906년 당시 충주공립보통학교의 신축을 위한 초석(礎石)으로 성돌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메킨지( F.A. McKENZIE)가 충주를 방문, 그의 사진 속에 '남문(鳳阿門)'으로 추정되는 문루와 수문청이 불탄 성문 하나가 존재한다.
또한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진행된 일제에 의한 '시구개정(市區改正)'으로 인해 성벽과 성문이 헐리고 그 자리는 도로가 되었으며, 기존의 도로 역시 자를 대고 직선화 도로로 새로 뚫거나 변형하여 현재의 시가지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충주수비대로 설명되는 사진이나, 예성별관의 3문과 청령헌의 위치로 보아 현재 관아골 식당과 그 동편으로 존재했던 위수분병원(衛戍分病院)으로 추정된다. 담을 따라 직선화된 도로는 동측 성벽을 헐어내고 만든 길로 보이며, 우측 하단의 곧게 뻗은 바닥 그림은 성돌을 이용해 놓은 하수시설로 해석된다. 성벽과 성문을 철거한 후에 성돌을 하수공사나 토관 공사 등에 이용한 것으로 일인들은 시구개정에 관한 사항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63년이 지난 1978년 (사)예성동호회에 의해 '예성신방석(蘂城信防石)'이라는 성돌이 발견됐고, 지난해 '북문'의 부속 조형물로 추정되는 '석누조(石漏槽;물홈돌)' 1개가 수습되어 충주박물관이 공개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최근 성내동 217번지의 건물 신축을 위한 철거 과정에서 9개의 성돌이 발견된 것이다.
이에따라 충주읍성의 실체를 발굴하고, 복원하기 위한 문화재 조사 및 발굴작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김희찬씨는 "과연 이것이 문화행정이요 역사도시라 자처하는 충주에서 행할 수 있는 일인가를 묻고 싶다"며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 역사자산을 찾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고 밝혔다.
충북방송국/ 천소영기자
김희찬(아이들의 하늘 간사) 씨에 따르면 조선시대 '충주목'관청이 있던 현재의 관아공원 인근 성내동 217번지 건축공사 현장에서 18일 충주읍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돌 9개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충주읍성은 1869년(고종 6년) 2월 충주목사 조병로의 주도로 개축돼 그해 11월 완성되었다. 이때 개축된 성의 둘레가 3천950척(1척≒30.3㎝일 경우 약 1.2㎞), 두께 25척(약 7.5m), 높이 20척(약 6m), 치첩(雉堞;여장) 415칸으로, 1872년에 제작된 '충주목지도'에 읍성의 모양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1896년 1월 을미의병의 충주성 점령과 그에 따른 전투, 퇴각하면서 방화로 인해 원형을 잃기 시작했고, 1906년 당시 충주공립보통학교의 신축을 위한 초석(礎石)으로 성돌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메킨지( F.A. McKENZIE)가 충주를 방문, 그의 사진 속에 '남문(鳳阿門)'으로 추정되는 문루와 수문청이 불탄 성문 하나가 존재한다.
또한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진행된 일제에 의한 '시구개정(市區改正)'으로 인해 성벽과 성문이 헐리고 그 자리는 도로가 되었으며, 기존의 도로 역시 자를 대고 직선화 도로로 새로 뚫거나 변형하여 현재의 시가지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충주수비대로 설명되는 사진이나, 예성별관의 3문과 청령헌의 위치로 보아 현재 관아골 식당과 그 동편으로 존재했던 위수분병원(衛戍分病院)으로 추정된다. 담을 따라 직선화된 도로는 동측 성벽을 헐어내고 만든 길로 보이며, 우측 하단의 곧게 뻗은 바닥 그림은 성돌을 이용해 놓은 하수시설로 해석된다. 성벽과 성문을 철거한 후에 성돌을 하수공사나 토관 공사 등에 이용한 것으로 일인들은 시구개정에 관한 사항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63년이 지난 1978년 (사)예성동호회에 의해 '예성신방석(蘂城信防石)'이라는 성돌이 발견됐고, 지난해 '북문'의 부속 조형물로 추정되는 '석누조(石漏槽;물홈돌)' 1개가 수습되어 충주박물관이 공개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최근 성내동 217번지의 건물 신축을 위한 철거 과정에서 9개의 성돌이 발견된 것이다.
이에따라 충주읍성의 실체를 발굴하고, 복원하기 위한 문화재 조사 및 발굴작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김희찬씨는 "과연 이것이 문화행정이요 역사도시라 자처하는 충주에서 행할 수 있는 일인가를 묻고 싶다"며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 역사자산을 찾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고 밝혔다.
충북방송국/ 천소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