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방송=조도환 논설위원] 진나라 말, 진의 시황제가 어느 날 꿈을 꾸는데, 진의 왕궁 한 가운데로 하늘의 태양이 흔들리더니 떨어지고, 그 태양을 푸른 옷의 동자가 나타나 집어가자, 붉은 옷을 입은 동자가 뒤이어 나오더니 끈질기게 달라붙어 결국은 태양을 차지하는데, 정작 시황제는 그걸 지켜보기만 하다 꿈에서 깬다.
태양은 하늘의 권위요, 그 권위가 땅으로 추락했는데 그걸 붉은 옷을 입은 자가 차지했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라며, 그 붉은 동자를 찾기 위해 진시왕은 마지막 여행을 아들 호해와 떠나면서, 진나라는 결국 푸른 동자와 붉은 동자의 싸움으로 접어든다.
그 붉은 동자가 바로 유방으로, 유방은 패현에서 서쪽으로 수륙천리가 넘는 여산의 진시황 무덤 공사를 위해 100여명의 무리들을 이끌고 가던 중, 망탕산에 이르렀을 때 도망가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부역행을 포기하고, 마침 길을 막고 있던 커다란 구렁이를 베어 죽이고는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산적생활을 하게 된다.
패현에서 주색잡기로 건달생활을 하던 유방은, 망탕산에서 산적생활 시작으로 패현을 접수하더니, 조참과 소하를 얻고 장량도 합세하면서 오광과 진승의 난으로 시작한 초·한전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게 된다.
초왕 의제에 의해 정서장군으로 임명되면서, 관중 땅을 먼저 차지하는 자에게 그 곳 왕을 제수하겠다는 공약에 함양으로 향하던 중, 역이기라는 노인을 만나 진유 땅에 무혈 입성하는 등, 운도 좋던 유방은 항우와는 달리 큰 전투 없이 먼저 함양에 입성해서 약법삼장을 선포하며, 도탄에 빠져있던 진나라 백성들의 지지까지 얻게 된다.
관중에 먼저 입성을 하였으나, 역발산기개세의 항우에겐 상대가 되질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유방은, 패상으로 물러나 항우를 맞았고, 유방을 살해하기 위해 항우가 연 홍문의 연회에선 범증의 계략에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장자방의 계책으로 자신을 항우의 신하라 칭하면서 위기를 벗어나 촉 땅으로 들어가 권토중래를 노리게 된다.
BC 206년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에 봉해진 유방은, 촉 땅을 나와 4년여에 걸친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소하·조참·장량·한신·번쾌·하우영 등 참모, 장수들과 함께 해하의 결전에서 항우를 이기고 초·한전을 마무리하면서, BC 202년 유방은 한나라 황제가 된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 평지에서 일어나 최초 망탕산에서 따르던 100여 무리의 산적들로 시작한 유방과, 초나라 귀족 출신으로 명문가 자제였으며, 강동 정병 8천과 수많은 후원자들이 있었던 항우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유방은, 제후나 귀족 같은 기존의 지배층과 연관 없는, 피지배층에서 황제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자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유방이 세운 한나라 후손, 한족(漢族)이라 자청할 정도로 한족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사수에서 정장이라는 말단 관리를 하면서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는 것도 어려웠고 음주가무에 도사였지만, 무능하고 무뢰한 건달은 아니고, 당시 귀족들과도 어울렸다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의 검술과 학문으로 말단 벼슬이나마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귀족처럼 멋있게 책도 읽고, 무예도 익히고, 높은 벼슬도 하고, 전쟁도 해서 많은 부하들과 칠첩도 거느려봐야지, 시골구석에 틀어박혀 청경우독이 웬 말이냐”라는 기록과,
함양에서 부역을 하고 있을 때 진시왕의 행차에 “대장부로 태어나서 실로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라고도 했다는 것을 보면, 대장부의 기질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백수건달로 막 살기만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사기의 기록에 토사구팽의 원조라 알려진 것도, 한 무제 시절 이릉의 사건에 연루돼 태사령이란 신분도 소용없이 궁형을 당했으니, 한나라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많은 없던 사마천의 사견이 많이 개입된 것으로, 사기가 사료가 아닌 소설이란 주장도 다수인 것을 보면, 유방에 대한 평가는 ‘한족의 시조’와 ‘토사구팽의 원조’란 대립이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귀족 출신으로 초패왕을 자처하며, 수많은 후견인과 기라성처럼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 들었지만, 애첩을 전장까지 끌고 다니며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 항우, 그 측근들이 ‘졸장부’, ‘소인배’라 평하며 떠나간 이유는 분명하다.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각고의 노력과 하늘의 도움으로 황제가 된 유방은,
하늘의 도움보단. 그의 타고난 지도자 기질과 두둑한 배짱, 화끈한 배포와,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 열린 귀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가슴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알았고, 소하·장량·한신의 한삼걸과 수많은 인재들을 능수능란하게 기용하는 용병술, 긍정적 마인드로 타인의 쓴 소리를 판단하는 능력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용기, 조언자와 비평가의 의견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았던 능력이 그가 황제가 된 원동력일 것이다.
특히, 그의 가장 큰 능력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것으로, 역이기의 제안을 수락하려다, 장자방이 젓가락 8개를 하나하나 부러트리면서 잘잘못을 따지자, 자신의 결정을 뒤집고 장량의 의견으로 전략을 변경한 사례는 유방의 인성을 짐작케 한다.
당대 관상가 여공(呂公)이 정장시절 유방의 관상을 보곤, 자신의 딸을 억지로 유방에게 시집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 법!
그래서
세습 ‘왕’이 아닌 선출직 ‘왕’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엄벙덤벙이 아닌, 제대로 준비된 자 이어야 한다!!!
#한국인성교육연합
태양은 하늘의 권위요, 그 권위가 땅으로 추락했는데 그걸 붉은 옷을 입은 자가 차지했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라며, 그 붉은 동자를 찾기 위해 진시왕은 마지막 여행을 아들 호해와 떠나면서, 진나라는 결국 푸른 동자와 붉은 동자의 싸움으로 접어든다.
그 붉은 동자가 바로 유방으로, 유방은 패현에서 서쪽으로 수륙천리가 넘는 여산의 진시황 무덤 공사를 위해 100여명의 무리들을 이끌고 가던 중, 망탕산에 이르렀을 때 도망가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부역행을 포기하고, 마침 길을 막고 있던 커다란 구렁이를 베어 죽이고는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산적생활을 하게 된다.
패현에서 주색잡기로 건달생활을 하던 유방은, 망탕산에서 산적생활 시작으로 패현을 접수하더니, 조참과 소하를 얻고 장량도 합세하면서 오광과 진승의 난으로 시작한 초·한전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게 된다.
초왕 의제에 의해 정서장군으로 임명되면서, 관중 땅을 먼저 차지하는 자에게 그 곳 왕을 제수하겠다는 공약에 함양으로 향하던 중, 역이기라는 노인을 만나 진유 땅에 무혈 입성하는 등, 운도 좋던 유방은 항우와는 달리 큰 전투 없이 먼저 함양에 입성해서 약법삼장을 선포하며, 도탄에 빠져있던 진나라 백성들의 지지까지 얻게 된다.
관중에 먼저 입성을 하였으나, 역발산기개세의 항우에겐 상대가 되질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유방은, 패상으로 물러나 항우를 맞았고, 유방을 살해하기 위해 항우가 연 홍문의 연회에선 범증의 계략에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장자방의 계책으로 자신을 항우의 신하라 칭하면서 위기를 벗어나 촉 땅으로 들어가 권토중래를 노리게 된다.
BC 206년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에 봉해진 유방은, 촉 땅을 나와 4년여에 걸친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소하·조참·장량·한신·번쾌·하우영 등 참모, 장수들과 함께 해하의 결전에서 항우를 이기고 초·한전을 마무리하면서, BC 202년 유방은 한나라 황제가 된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 평지에서 일어나 최초 망탕산에서 따르던 100여 무리의 산적들로 시작한 유방과, 초나라 귀족 출신으로 명문가 자제였으며, 강동 정병 8천과 수많은 후원자들이 있었던 항우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유방은, 제후나 귀족 같은 기존의 지배층과 연관 없는, 피지배층에서 황제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자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유방이 세운 한나라 후손, 한족(漢族)이라 자청할 정도로 한족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사수에서 정장이라는 말단 관리를 하면서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는 것도 어려웠고 음주가무에 도사였지만, 무능하고 무뢰한 건달은 아니고, 당시 귀족들과도 어울렸다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의 검술과 학문으로 말단 벼슬이나마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귀족처럼 멋있게 책도 읽고, 무예도 익히고, 높은 벼슬도 하고, 전쟁도 해서 많은 부하들과 칠첩도 거느려봐야지, 시골구석에 틀어박혀 청경우독이 웬 말이냐”라는 기록과,
함양에서 부역을 하고 있을 때 진시왕의 행차에 “대장부로 태어나서 실로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라고도 했다는 것을 보면, 대장부의 기질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백수건달로 막 살기만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사기의 기록에 토사구팽의 원조라 알려진 것도, 한 무제 시절 이릉의 사건에 연루돼 태사령이란 신분도 소용없이 궁형을 당했으니, 한나라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많은 없던 사마천의 사견이 많이 개입된 것으로, 사기가 사료가 아닌 소설이란 주장도 다수인 것을 보면, 유방에 대한 평가는 ‘한족의 시조’와 ‘토사구팽의 원조’란 대립이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귀족 출신으로 초패왕을 자처하며, 수많은 후견인과 기라성처럼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 들었지만, 애첩을 전장까지 끌고 다니며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 항우, 그 측근들이 ‘졸장부’, ‘소인배’라 평하며 떠나간 이유는 분명하다.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각고의 노력과 하늘의 도움으로 황제가 된 유방은,
하늘의 도움보단. 그의 타고난 지도자 기질과 두둑한 배짱, 화끈한 배포와,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 열린 귀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가슴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알았고, 소하·장량·한신의 한삼걸과 수많은 인재들을 능수능란하게 기용하는 용병술, 긍정적 마인드로 타인의 쓴 소리를 판단하는 능력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용기, 조언자와 비평가의 의견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았던 능력이 그가 황제가 된 원동력일 것이다.
특히, 그의 가장 큰 능력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것으로, 역이기의 제안을 수락하려다, 장자방이 젓가락 8개를 하나하나 부러트리면서 잘잘못을 따지자, 자신의 결정을 뒤집고 장량의 의견으로 전략을 변경한 사례는 유방의 인성을 짐작케 한다.
당대 관상가 여공(呂公)이 정장시절 유방의 관상을 보곤, 자신의 딸을 억지로 유방에게 시집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 법!
그래서
세습 ‘왕’이 아닌 선출직 ‘왕’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엄벙덤벙이 아닌, 제대로 준비된 자 이어야 한다!!!
#한국인성교육연합
조도환 논설위원 smspd1@naver.com
